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합스부르크 가문 (문단 편집) === 최전성기 === 16세기 [[카를 5세]] 대에 마침내 합스부르크 가문은 유럽의 패자로 등극했다. 그 기반을 만든 것은 할아버지 [[막시밀리안 1세(신성 로마 제국)|막시밀리안 1세]]였다. 막시밀리안 1세는 스스로 최초의 '선출황제'(Electus Romanorum Imperator)[* [[독일어]]로는 Erwählter Römischer Kaiser이다.]임을 선언하면서 황제 선출에서 교황의 간섭을 완전히 배제했다. 안정된 황권을 바탕으로 막시밀리안 1세는 적극적인 '''결혼 정책'''을 펼쳤다. '''[[저지대 국가|저지대]]'''를 보유하게 된 [[발루아 왕조|발루아부르고뉴 가문]]의 '''[[부르고뉴국|부르고뉴 공국]]''', 이제 막 레콩키스타를 완수하고 [[이베리아 반도]]를 장악한 트라스타마라 가문의 연합 '''[[스페인 왕국]]''', 그리고 동유럽에서 '''[[헝가리 왕국]]'''과 그 [[동군연합]]인 '''[[크로아티아 왕국]]''', [[슐레지엔]]을 포함한 '''[[보헤미아 왕국]]''' 등 막대한 영토를 보유한 [[야기에우워 가문]]와의 혼인을 차례로 성사시켰다. 이런 혼인 동맹 이후에 합스부르크 가문에 기적 같은 행운이 일어났는데 '''이 [[가문]]들의 부계가 끊기면서 그 가문들의 영토를 합스부르크 가문이 그대로 인수했다.'''[* 정확히는 발루아 가문 내에서도 부르고뉴 공국을 다스리던 발루아부르고뉴 가문, 야기에우워 가문 내에서도 헝가리-크로아티아 왕국과 보헤미아 왕국을 다스리던 야기에우워 가문 한정이다. 다만 [[프랑스 왕국]]을 다스리던 발루아 가문과 [[폴란드-리투아니아 연방]]을 다스리던 야기에우워 가문 역시 [[앙리 3세|얼마 지나지 않아]] [[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트|부계가 끊겼다.]]] 15세기 중반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를 다시 차지하게 된 합스부르크 가문은 [[쾰른]] 등의 [[라인강]] 유역과 특히 합스부르크의 영향력하에 있었던 알자스 등지에서 팽창 정책을 펼치던 [[부르고뉴국]]과 적대적인 관계에 놓였었다. 그러나 부르고뉴 공작이었던 용담공 샤를이 외동딸 [[마리 드 부르고뉴]]를 남긴 채 낭시 전투에서 전사했다. 이에 부르고뉴국과 같은 [[발루아 왕조]]이자 명목상의 종주국이었던 [[프랑스 왕국|프랑스]]가 유럽 내에서도 손꼽히게 부유했던 부르고뉴를 향한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. 당시 [[프랑스 국왕]] [[루이 11세]]는 용담공 샤를이 전사하자마자 남자 계승자가 없다는 이유로 부르고뉴를 침공했으며, 저지대의 백성들을 선동하여 마리 드 부르고뉴를 겐트 성에 가둬버린 후 [[샤를 8세|자신의 7살 난 아들]]과의 결혼을 강요했다. 부친의 급사 이후 부르고뉴 여공작이 된 마리 드 부르고뉴는 프랑스에 대항하기 위해, 부르고뉴를 지켜줄 힘을 가지고 있었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[[프리드리히 3세(신성 로마 제국)|프리드리히 3세]]의 아들 [[막시밀리안 1세(신성 로마 제국)|막시밀리안]]과 결혼했다. 이를 통해 프랑스가 그토록 군침을 흘리며 노리던 북해 연안 17주, 특히 [[플랑드르]]가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향력 아래에 놓였다. 합스부르크 가문이 [[유럽]]을 장악하는 기틀을 닦았다고 평가받는 [[명군]] [[막시밀리안 1세(신성 로마 제국)|막시밀리안 1세]]는 프랑스가 [[브르타뉴 공국]]으로 손을 뻗자 브르타뉴 공국의 상속녀인 [[안 드 브르타뉴]]과의 정략 결혼을 추진하려 하는 등 서쪽 국경의 판도를 계속 넓혀나갔다. 이 때 합스부르크 뿐만 아니라 프랑스의 라이벌이었던 [[잉글랜드 왕국]], [[카스티야 연합 왕국]] 등까지도 안과의 [[정략결혼]]을 추진하면서 프랑스를 견제하려 했으나, 안은 오스트리아의 막시밀리안을 선택했다. 그러나 동서로 적에게 둘러싸이는 것을 경계한 프랑스 국왕 [[샤를 8세]]가 무력으로 브르타뉴를 침공하고 안과 강제로 결혼하면서 결국 브르타뉴 공국은 프랑스의 영토가 되었다. 막시밀리안 1세는 무엇보다도 결혼 동맹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. 그는 장남 [[펠리페 1세|필리프]]를 트라스타마라 왕조 카스티야 왕국의 왕녀 [[후아나(카스티야)|후아나]]와 결혼시켰고, 딸인 [[오스트리아의 마르가레테|마르가레테]]는 [[아스투리아스 공]] 후안과 결혼시키면서 연합 스페인 왕국과의 결혼 동맹을 결성했다. 기존 후계자였던 후안이 사망하면서 스페인은 일차적으로 필리프와 후아나가, 이차적으로는 둘의 장남 [[카를 5세]]가 물려받았다. 또 막시밀리안 1세는 보헤미아와 헝가리-크로아티아 왕위를 차지하고 있었던 [[야기에우워 왕조]]와의 껄끄러운 관계에도 불구하고 오랜시간 공을 들여 결혼 동맹을 성사시켰다. 합스부르크 가문은 1438년 [[룩셈부르크 가문]]이 단절되었을 때, 신성 로마 제국의 제위와 함께 보헤미아와 헝가리-크로아티아의 왕위도 일시적으로 차지했으나 당시 두 나라의 현지 귀족이 실권을 쥐고 있어 제대로 왕권을 행사할 수 없었고, 약 2년만에 보헤미아와 헝가리-크로아티아 왕위를 상실했다.[* 보헤미아와 헝가리-크로아티아 왕위를 얻은 [[알브레히트 2세]]의 아들 [[라디슬라우스 포스투무스]]가 요절했기 때문이다. 보헤미아에서는 [[이르지 스 포데브라트]]를, 헝가리와 크로아티아에서는 [[후녀디 야노시]]의 차남이었던 [[마차시 1세]]를 선출했고, 후스파 문제 등으로 혼란스러웠던 보헤미아에서는 이르지의 사후 라디슬라우스의 누나 엘리자베트와의 혼맥을 이유로 [[폴란드 왕국]]과 [[리투아니아 대공국]]을 통치하고 있었던 [[야기에우워 왕조]]를 옹립했다.] 이후 보헤미아와 헝가리-크로아티아 왕위는 야기에우워 왕조가 차지했는데, 결혼동맹의 대가 [[막시밀리안 1세(신성 로마 제국)|막시밀리안 1세]]는 이 야기에우워 왕조 출신의 [[울라슬로 2세]]의 딸 [[보헤미아와 헝가리의 언너|언너]]와 카를 5세의 동생인 [[페르디난트 1세|페르디난트]]를, 안나의 동생 [[러요시 2세]]와 손녀딸 마리아[* 카를 5세와 페르디난트 1세의 여동생으로 필리프와 후아나의 3녀.]를 결혼시켰다. 그런데 [[오스만 제국]]의 [[파디샤]] [[쉴레이만 1세]]의 침공으로 [[모하치 전투]]에서 러요시 2세가 전사하여 헝가리-크로아티아-보헤미아의 야기에우워 왕조가 갑작스럽게 단절되었고, 두 나라의 왕위는 페르디난트 1세를 통해 사실상 합스부르크 가문의 세습 지위가 되었다.[* 엄밀히 말해 보헤미아와 헝가리-크로아티아는 1918년까지 [[선거군주제]]를 유지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합스부르크 가문이 보헤미아와 헝가리 귀족들의 반란 시도를 모두 좌절시키고 왕권을 공고히 하면서 합스부르크 가문에서만 왕위 후보자가 나올 수 있도록 준세습화되었다.] 막시밀리안 1세의 손자이자 스페인 [[이사벨 1세|가톨릭]] [[페란도 2세|부부왕]]의 손자였던 [[카를 5세]]는 부모와 조상의 후광, 특히 할아버지의 노력 덕분에 막대한 영토를 다스리게 되었다. 이 시대의 합스부르크 가문은 외형상 최전성기를 맞았다. 카를 5세가 통치하게 된 [[카스티야 연합 왕국]]과 [[아라곤 왕국]]은 막 통일을 이루고 대서양 무역을 장악하며 신대륙까지 접수에 들어간 강대국으로, 합스부르크 가문은 유럽의 강대국을 둘이나 가지게 되었다. 이 카를 5세 치하의 제국은 이를 저지하려던 [[이탈리아 전쟁|발루아 왕조의 프랑스와 맞붙어 연이어 승리를 거두며]] 이탈리아 반도를 합스부르크 왕조의 영향력 아래로 편입시켰다. 카를 5세에 의해 처참하게 박살난 프랑스는 [[30년 전쟁]]으로 화려한 부활을 선언할 때까지 100년 동안 유럽 구석에서 버로우하게 된다. 잉글랜드의 [[헨리 8세]]는 필요에 따라 양측에 적절히 붙고 배신하면서 자국의 안정을 도모했지만 카를 5세는 헨리 8세의 이혼과 재혼 허가조차 좌지우지할 만큼 권력이 막강했다. 그야말로 거칠 것이 없었던 합스부르크의 패권을 새로 위협하기 시작한 두 개의 변수는 바로 [[종교개혁]]과 [[오스만 제국]]이었다. 특히 북독일의 [[프로테스탄트]] 세력을 짓밟기 위해 스페인군을 독일로 데려온 것이 정치적인 패착이 되었다. [[독일인]]이 주류인 [[신성 로마 제국]]의 일에, [[동군연합]]이라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사적인 혈연으로 연결되었을지언정 결국은 '''외국 군대'''인 [[압스부르고 왕조|스페인]]군을 개입시킴으로써 [[독일어권]] 세력들 간의 연대의식을 방해했음은 물론, [[암묵의 룰]]을 깼기 때문이다. 그 순간부터 독일의 제후들은 종교와는 별개로 합스부르크 가문에게 짙은 불신을 가지게 되었고, 그 결과가 [[30년 전쟁]] 및 신성 로마 제국의 콩가루화였으며 결과적으로 16세기 [[마르틴 루터]]에 의해 촉발된 종교개혁은 신성 로마 제국의 독일 영방을 산산조각내며 분열시켰다.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최전성기를 맞은 [[쉴레이만 1세]] 치하의 [[오스만 제국]]이 [[헝가리 왕국]]을 무너뜨리고 동쪽 국경을 엄습했다. [[내전]]과 1529년의 [[1차 빈 포위]]로 말미암아 합스부르크는 광대한 영토 전면에 걸쳐 전선을 확장시켜야 했다. 가히 호사다마라 할 수 있는 최악의 위기였지만 카를 5세는 군제개혁을 통한 전술상의 성공과 신대륙에서 쏟아져 나오는 부, 그리고 그간 다져온 많은 조력자들의 도움을 등에 업고 겨우 가문의 유산을 지켜냈다. 다만 [[막시밀리안 1세(신성 로마 제국)|막시밀리안 1세]] 이래로 추진되어온 합스부르크 가문의 절대왕정 수립 시도는 무위로 돌아가 영방 체제가 계속되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